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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의 역습 ①] 일본은 왜 금리를 0%까지 내려도 살아나지 못했나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단순히 금리를 너무 늦게 내린 결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은행은 정책금리를 1990년 6%에서 1998년 0.25%까지 낮췄지만 경제는 빠르게 살아나지 못했다. 돈의 가격은 내려갔지만 기업과 금융기관의 행동이 이미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산가격 상승기에 빚을 늘려 투자하던 기업들은 버블 붕괴 뒤 이익이 나도 신규투자보다 부채상환을 우선했고, 은행은 부실채권을 떠안은 채 대출에 소극적으로 변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대차대조표 불황’이다. 금리를 내려도 경제주체가 돈을 더 빌리지 않고 기존 부채를 줄이는 데 집중하면 통화완화의 효과가 크게 약해진다. 일본은 여기에 자산가격 하락, 은행 부실, 임금 정체와 디플레이션이 겹치면서 단순 경기침체를 넘어 장기간의 저성장 구조로 빠져들었다.


저금리로 시작된 버블…2.5% 금리가 2년 넘게 이어졌다

일본 버블의 배경에는 1980년대 중후반의 장기간 통화완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은행 자료에 따르면 정책금리는 1985년 12월 5%에서 1987년 2월 2.5%까지 낮아졌고, 이 수준이 2년 넘게 유지됐다. 엔화 급등에 따른 경기둔화 우려와 1987년 블랙먼데이 이후 금융시장 불안이 완화를 지속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낮은 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은 주식과 부동산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일본은행 자료에 따르면 닛케이 지수는 1989년 말 3만8,000선을 넘어섰다가 1990년 초부터 급락해 약 2년 반 만에 1만6,000선까지 밀렸다. 도쿄 맨션 가격지수도 1986년 대비 1990년 정점에서 약 3배까지 올랐지만 이후 3년 동안 약 30% 떨어졌고, 2000년에는 다시 1986년 수준 부근까지 내려왔다.


시점주요 변화의미출처
1985년 12월정책금리 5.0%엔고·경기둔화 대응 완화 시작일본은행
1987년 2월정책금리 2.5%이후 2년 이상 저금리 유지일본은행
1989년 5월통화긴축 시작자산가격 과열 대응일본은행
1990년 8월정책금리 6.0%버블 정점 이후 금융여건 급격히 긴축일본은행
1990년대 초주가·부동산 가격 급락기업·금융기관 대차대조표 훼손일본은행
1998년 9월정책금리 0.25%사실상 제로금리 국면 진입일본은행
1998년 여름물가상승률 0% 하회디플레이션 장기화의 출발점일본은행


금리 인상이 버블을 터뜨렸지만, 침체를 길게 만든 것은 ‘빚을 갚는 경제’였다

일본은행은 1989년부터 긴축으로 돌아서 1990년 8월 정책금리를 6%까지 올렸다. 금리상승과 함께 주식과 토지가격이 하락하면서 기업이 담보로 보유한 자산가치가 급격히 줄었다. 문제는 자산가격은 떨어졌지만 부채의 명목금액은 그대로 남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00억엔의 부동산을 보유하면서 70억엔을 빌린 기업의 자산가격이 50억엔으로 떨어진다고 가정하면 순자산은 30억엔에서 마이너스 20억엔으로 바뀐다. 이 기업의 최우선 경영목표는 더 이상 설비투자와 사업확장이 아니다. 현금을 확보하고 자산을 팔아 부채부터 줄이는 것이 생존전략이 된다.


일본 기업들은 실제로 버블 붕괴 후 과잉부채·과잉설비·과잉고용이라는 ‘세 가지 과잉’을 줄이는 장기간의 조정에 들어갔다. 일본은행은 버블 정점에서 이후 저점까지 일본의 국부가 약 900조엔 감소했으며 이는 당시 일본 GDP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거대한 자산 디플레이션은 기업의 투자와 차입 행동 자체를 바꿔 놓았다.


금리를 내려도 대출이 늘지 않았다…통화정책의 전달경로가 끊겼다

일반적인 경기침체라면 금리를 낮추면 차입비용이 줄고 기업투자와 가계소비가 늘어난다. 하지만 버블 붕괴 후 일본에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금리가 떨어져도 기업은 “싸게 빌려 투자하자”보다 “이자가 줄었으니 빚을 더 빨리 갚자”는 쪽으로 움직였다.


은행 역시 적극적으로 신용을 공급하기 어려웠다. 주식과 부동산을 담보로 늘렸던 대출이 대규모 부실채권으로 바뀌었고, 1997~1998년에는 대형 금융기관의 파산이 이어지면서 신용경색이 심화됐다. 일본은행은 이 과정에서 경기악화, 부실채권 증가, 가격하락과 엔화강세가 상호 증폭되는 악순환이 형성됐다고 평가했다.


1990년 6%였던 정책금리는 1998년 0.25%까지 내려갔지만 성장 회복은 제한적이었다. 통화정책 자체가 아무 효과도 없었다기보다 금리를 낮춰도 민간이 대출과 투자를 늘리지 않는 구조로 경제가 바뀌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부채조정이 디플레이션으로 바뀐 순간

부채상환은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동시에 투자와 지출을 줄이면 경제 전체에서는 수요가 부족해진다. 기업은 가격을 올리기 어려워지고 임금인상도 억제된다. 가계는 소득 전망이 약해지면서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다시 투자에 더 신중해진다.


물가가 떨어지면 명목부채가 줄지 않는 한 실질 부채부담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 매출과 임금은 정체하거나 감소하는데 갚아야 할 원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부채 디플레이션’이다. 일본에서는 1998년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내려간 이후 저물가와 디플레이션이 장기간 이어졌고, 경제주체도 낮은 임금과 낮은 가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 지점부터 경기침체는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행동양식이 됐다. 기업은 현금과 예금을 쌓고 공격적인 투자를 피했으며, 소비자는 가격이 쉽게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소비를 서두르지 않았다. 금리를 낮추는 것만으로는 이 기대를 바꾸기 어려웠다.


철강산업에는 ‘내수 감소와 구조조정’으로 나타났다

일본 철강산업은 이 거시경제 변화의 대표적인 수요산업 사례다. 일본제철은 일본의 철강 내수가 1990년 정점 대비 40% 이상 감소해 최근에는 연간 약 5,000만톤 수준까지 내려왔다고 설명한다. 일본제철 기술자료 역시 1990년대 버블 붕괴와 엔화 강세 이후 철강 수요가 둔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건설투자 위축은 철근·형강 등 봉형강 수요를 누르고, 설비투자 감소는 열연과 후판 등 판재류 소비에 부담을 준다. 자동차와 가전 등 제조업 역시 내수 성장 둔화와 해외생산 확대가 겹치면서 일본 철강사들이 국내 수요 증가만으로 생산능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일본 철강산업은 장기간의 구조조정과 재편을 거쳤다. NKK와 가와사키제철이 2002년 JFE홀딩스로 통합됐고, 2012년에는 신일본제철과 스미토모금속이 합병했다. 개별 기업의 합병 배경을 버블 붕괴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수 정체와 글로벌 경쟁 심화가 대형화를 촉진한 구조적 배경이 됐다.


현재 일본의 조강 생산은 연간 8,000만톤대로 내려와 있다. 일본제철도 국내 철강소비가 성숙국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어 일본 조강 생산이 장기적으로 감소 국면에 놓일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버블 붕괴가 끝난 지 30년이 넘었지만 철강 수요 측면에서는 당시 시작된 구조변화가 아직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이 일본에서 봐야 할 것은 ‘금리’보다 ‘부채의 주체’다

일본 사례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저금리를 오래 유지했다는 사실이나 금리를 빠르게 올렸다는 사실 하나에 있지 않다. 낮은 금리와 자산가격 상승기에 부채가 크게 늘었고, 버블이 꺼진 뒤 경제 전체가 그 부채를 줄이는 과정에 들어갔다는 점이 핵심이다.


부채를 줄이는 과정이 짧으면 경기조정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자산가격 하락과 금융기관 부실, 인구구조 변화까지 동시에 겹치면 부채상환이 투자와 소비를 장기간 압박하면서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는 다음 회에서 살펴볼 ‘누가 빚을 지고 있는가’에 있다. 일본 버블 당시에는 기업부채가 문제의 중심이었다. 현재 한국은 가계부채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에서 기업의 부채조정이 설비투자를 줄였다면, 한국에서는 가계의 부채조정이 소비를 직접 줄이는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자료: 일본은행(BOJ), 일본제철, 일본철강연맹. 수치와 역사적 시점은 각 기관 공개자료를 기준으로 재구성했다.


[부채의 역습①] 일본은 왜 ‘제로금리’에도 살아나지 못했나…버블 뒤에 남은 빚

[부채의 역습②] 일본은 기업이 빚졌고 한국은 가계가 빚졌다

[부채의 역습③] 84조달러 빚진 미국은 왜 버티나…문제는 ‘정부부채’

[부채의 역습④] 美 10년물 5%가 한국 부동산을 흔드는 경로 [부채의 역습⑤] 소비가 사라지고 빚만 갚는 경제…한국도 일본의 길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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